1. 초나라의 멸망

진나라는 기원전 226년 한나라의 구 귀족들의 반란에 놀랐고, 점령만 하면 군민들은 손쉽게 통치할 줄 알았지만 그들은 만약 진나라가 흔들리면 다른 점령지의 군민들 모두가 들고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초나라는 남쪽의 진나라의 영토와 버금가는 대국이었고, 비록 회왕 이후에 나라는 쇠퇴하였지만 상기 위나라나 한나라처럼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진나라는 기존에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던 이신과 몽염 장군을 기용하여 기원전 225년에 20만 대군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이신은 군을 몽염과 반으로 나눠서 평여지역과 침구를 공격하였고 초나라 군을 순차적으로 격파하였다. 순식간에 초나라의 수도 수춘까지 압박해 들어갔다. 당시 초나라는 이미 쇠퇴한 상태였고, 유일하게 믿을 장수는 항우의 할아버지로도 유명한 항연장군 뿐이었다.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영토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였고, 진나라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창평군을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로부터 파견된 초나라 공자 창평군이 오히려 반진세력을 결집하였고 이로 인해 진나라는 예상치 못한 반란으로 인해 보급이 차단당하고 퇴로가 막혔다. 동시에 항연이 군사들을 이끌고 틈을 놓치지 않으면서 공격해 들어갔고 진나라는 패배하고 말았다.

진나라의 시황제는 초나라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달았고, 일전에 배제시켰던 노장 왕전을 다시 기용하기로 하고 친히 왕전의 집을 찾아가서 노장군 왕전에게 60만의 대군을 주며 초나라 공격을 명한다. 만약 진나라입장에서는 초나라에게 또 패해서 이들이 북상한다면 위나라와 한나라 귀족들이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왕전은 말 그대로 초나라의 운명을 등에 업고 출전하였다.

진나라는 당시에 공격자답지 않게 수비적인 전략을 취하였는데, 이는 위/한/조 3국을 멸망하여 후방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였고, 상앙개혁을 통한 정치 및 경제시스템의 선진화로 대량의 물자 지원이 가능하여 장기전을 펼칠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장기간 대치하면서 군사들을 훈련하고 배불리 먹일 수 있었고, 초나라는 장기간 대치하면서 오히려 생산력이 진나라에 비해 떨어졌기에 점차 균열이 생겨났고,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감이 가득했기에 점차 진나라 쪽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초나라는 1년 넘는 대치 끝에 동쪽으로 철군하였고, 진나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으면서 초군을 격파하고 항연도 전사하고 만다. 왕전은 기세를 몰아서 수도 수춘을 공격하여 초왕 부추를 사로잡았다. 이후에 창평군이 회남에서 초왕으로 옹립되었으나 기원전 223년 왕전이 회남까지 공격해 들어가면서 창평군이 죽으면서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2. 연나라의 멸망

조나라가 무너지면서 진나라의 다음 상대는 자연스럽게 연나라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군사들은 진군하면서 연나라 국경에 이르렀고, 연왕 희는 이 기세에 놀라 겁을 먹었다. 이때 태자 단은 서쪽으로는 조나라의 잔존세력과 남쪽으로는 제나라와 연합하고 초나라와는 동맹을 맺으며 북쪽의 흉노와는 우호관계를 형성하여 합종형태로 진나라에 다시 대항하려고 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이러한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려웠다. 태자 단은 진나라의 핵심인 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인 형가를 파견하여 기원전 227년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진나라는 분노에 휩쌓이며 왕전으로 하여금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였고, 순식간에 연나라 수도인 계성까지 점령하였다. 연나라왕과 태자는 양평으로 도주하였는데, 연나라의 운명이 다하였는지 이때 진나라 장군 이신에 의해 주력군 대부분이 기습에 의해 패퇴하였고, 연왕 희는 판단력을 상실하였는지 태자 단을 자객을 보내 죽이고 그 목을 진나라에 바치게 된다. 진나라는 이때 연에 대한 공격은 멈추지만 초나라 평정을 완료하자마자 기원전 222년 진나라 장군 왕분은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여 연왕 희를 포로로 잡으면서 연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연나라 입장에서는 조나라가 힘을 쓸 수 있던시기에 조나라를 돕지 못하였고, 이는 마치 입술을 잃고 이를 보호할 방법이 없었고 연나라는 자연스럽게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3. 제나라의 멸망

제나라는 기원전 284년의 제서전투 이후로 국력은 쇠퇴하였고, 제나라는 군사적으로 큰 패배를 겪은 후에 출병을 수십년간하지 않으면서 군사력은 매우 약한 상태였고, 제나라 재상은 진나라에 완벽하게 매수되어 진나라에게 공격받는 국가들을 지원하지 않게 막았고, 덕분에 진나라는 손쉽게 제나라 주변 국가들을 평정하면서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제나라는 뒤늦게 진나라에 대항하기 시작하였고 서쪽으로 주력군을 집중시키면서 진나라 장군 몽염과 대치하였다. 당시 제나라는 서쪽으로 장성을 길게 쌓아서 견고하게 방어를 하였고, 진나라의 군대는 강하였으나 이런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부는 연나라와 맞닿은 상황에서 방어가 상대적으로 허술하였고, 연나라가 멸망 후 진나라는 연나라 남쪽에서부터 출병하여 제나라 북부를 공격하였는데 너무나 그 방비가 허술하여 순식간에 수도 임치까지 포위하게 된다. 수도가 포위됨에 따라 제나라는 순식간에 무력화되었고, 진나라는 재차 제나라에게 항복을 권하였고, 제나라의 재상마저도 진나라에게 매수된 상황에서 항복을 권하니 제나라 왕 건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후 제나라 왕은 연금되어 굶어 죽고 매수한 재상 또한 쓸모가 없어지며 처형하게 된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드디어 중국최초의 통일을 완성한 왕조가 된다. 진나라는 처음에 일개 변방 국가에 불과했지만 지리적 이점을 충분하게 활용하고 법가 사상에 의해 나라를 통치하면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초로 하였고, 외교적으로 합종책을 분쇄시키면서 육국을 하나씩 격파해 나갔고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된다.

 

다음편은 짧지만 강했던 진나라 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1. 조나라의 멸망

조나라는 전편에서 언급한 4차 침공 이후, 회복의 시간이 없었고, 진나라는 한나라를 흡수하면서 군사력은 증가되고 영토가 오히려 늘어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조나라는 천재지변에 시달리면서 나라 대부분이 대지진으로 인해 건물이 무너지고, 가뭄이 발생하면서 기근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러한 고통에 진나라의 왕은 정벌을 미루려고 하지만 신하들은 어려운 시기야 말로 우리가 공격해야 할 좋은 시기라고 전언하며, 가장 위협적인 적인 조나라를 두 번째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전에 언급한 장평대전에서 대패하여 수십만이 몰살당한 조나라였지만 군사력은 여전히 강한 편에 속하였다.

진나라는 기원전 229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3개 방향으로 나눠서 수도 한단으로 향했다. 진나라는 남북으로 협동하는 모양새로 공략하려고 했지만 조나라 최후의 명장인 이목과 사마상은 이에 대비하여 성을 굳건하게 지키며 농성을 준비하였고, 해자와 보루를 튼튼하게 쌓아서 진나라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진나라의 왕전은 이러한 이목이 걸림돌이라고 생각했고 군사적으로는 우세에 있었지만, 조나라 군은 북방에 있으면서 군 전체적으로 기동력이 우수한 편이어서 쉽게 군을 나눠서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왕전은 병사들에게 수비만 명하면서 중앙 조정에 이목을 제거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조나라는 이미 진나라를 막아내는데 힘에 겨웠다. 지난 4차례 침공에서 계속되는 소모전으로 이기기는 했지만 병사들을 계속 잃고, 한나라의 전력까지 흡수 해버린 진나라는 그야말로 무적 그 자체였다. 또한 진나라 군을 또 격퇴해도 순식간에 재정비를 하여 진나라는 또다시 침공할 것이고 조나라는 열세 몰려 언젠가는 무너질 운명이었다. 조나라의 이런 상황 때문에 장군과 군사들은 밖에서 선전했지만, 내부적으로 신하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이러한 틈을 눈치채고 반간계를 펼쳤는데 제거 목표는 바로 조나라 명장 이목하고 사마상이였다. 진나라는 반간계를 펼치기에 앞서 조나라의 재상 곽개를 매수하였다. 곽개는 조나라 유목왕이 태자 시절부터 총애해온 대신인데 탐욕이 강하고 아첨을 잘하는 자였다. 그는 조나라의 염파마저 모함을 했던 전과가 있었고, 진나라는 그러한 곽개를 이용하기 위해 조나라의 첩자들을 활용해 황금을 바쳤다. 곽개와 더불어 조나라의 태후 이전에 이목에게 모욕을 당하고 본인의 출신이 미천한 점을 비판하였던 이목을  미워했기에 둘이서 동시에 이목을 모함하였다.

곽개는 이목의 필체까지 베껴서 적극적으로 모함하였고, 유목왕은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가면서 이목의 병권을 회수하고 왕족인 조총에게 통수권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목은 이를 거부하다가 유목왕이 보낸 암살자에게 참살당하고, 사마상이 간언을 올리지만 그러한 사마상마저도 파면 당하고 만다. 이렇게 조나라의 두 기둥이 뽑히면서 사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고, 진나라는 파죽지세로 조나라를 뚫게 되었고, 한단을 포위하였다. 이에 조나라는 결국 항복하고 유목왕은 유배되었다. 조나라의 마지막 남은 공자인 조가는 일부 장군과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 대군이라는 곳에서 조왕으로 칭하며 저항했지만 이마저도 기원전 222년 진나라 왕분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고 만다. 이렇듯 유일하게 마지막 남은 충신인 이목과 사마상을 내친 조나라의 패배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2. 위나라의 멸망

 진나라는 기원전 226년 연나라 수도 계를 점령하면서 진나라 장군 왕전의 아들은 왕분은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북부 지역을 휩쓸면서 초나라를 궁지에 몰아넣음 과 동시에 기원전 225년에 왕분의 군사들이 다시 위나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순식간에 포위하였다. 

위나라의 수도 대량은 오랜기간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면서 비교적 견고한 도시였고, 진나라 군사의 사기는 높았지만 위나라 군사 숫자도 10만이 넘고 물적자원도 충분하여 방어를 튼튼히 하고 있었다. 수차례 공세에도 위나라는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 둘 멸망이 가까워지자 다른 나라들도 반란이나 아니면 방관하던 국가들 또한 대비태세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이렇게 위나라 공략에 애를 먹자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는데 바로 수공이었다.

일찍이 신릉군이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에 유세를 펼칠 때 수도 대량이 수공에 취약한 점을 경고하였다. 대량은 황하와 인접하여 지세가 낮아서 언제든 수공의 위험성이 있었고, 진나라의 왕분은 군사들에게 대량 주위의 수로를 장악하여 제방을 쌓고 황하의 물길을 틀어내는 공사를 하였다. 이후 10일에 걸쳐 내린 비에 물이 쌓였고 둑을 터트리면서 대량성은 물바다가 되었다.

위나라의 수도가 이렇게 수공으로 파괴되자 수 많은수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구원군은 없었다. 더불어 수많은 백성들의 피부와 곡식이 물에 잠겨서 썩어 들어갔고, 마실 수 있는 물이 고갈되었다. 또한 성벽도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왕분은 총공세를 펼쳤고 수 차례 교전 끝에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결국 항복하였다.

정공법으로 겨우 막아내던 진나라였는데 위나라는 수공을 당하니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의 하늘은 진나라 편이였는지 정공법이 안 되면 수공까지 어떠한 전략을 써도 다 통하였고 이를 통해 계속되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렇게 기존에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의 삼국 모두 멸망당하고 만다.

 

이제 육국 중에서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가 남았고 3개 나라 모두 진나라 입장에서는 손쉽게 공략을 하게 되는데 나머지 3개 국가 정벌하는 과정은 다음 편에서 다루고자 한다.

1. 통일의 사전 작업 - 진의 조나라 공격

(1) 1차 공격

진나라는 전국 통일 전쟁을 시작하면서 그 첫 번째로 제압해야 할 상대는 조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국경을 마주하면서 양질의 군사력을 가진 조나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에 기원전 236년에 이사의 계략으로 조나라와 연나라 간의 이간책으로 인한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나라의 주력군이 연나라와 전투를 벌이는 동안 진나라는 남북으로 루트를 구성하여 조나라를 파죽지세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조나라의 유목왕은 상황을 뒤늦게 인지하여 연나라에 출전한 군대를 불러들이고 수도 한단의 남쪽 장수지역과 북으로는 태항산에 이르는 장성에 의지하여 방어를 하였다.

이때 진나라 내부에서 승상 여불위과 반란사건과 연루되는 사건도 발생하며 내부적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해졌고, 이러한 내부문제에 더하여 우호 조약을 체결한 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함에 따라 이를 돕기 위해 초나라를 공격하면서 1차 공격은 끝이 났고 양국은 휴전에 들어가게 된다.

 

(2) 2차, 3차 공격

진시황과 그 지도부는 조나라와의 전쟁을 마무리하지 않고 초나라를 공격하는 전략을 다시 전환하였다. 결국에 그들은 초나라 보다는 조나라를 큰 적수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위의 장성을 우회하여 수도 한단의 남동쪽인 평양과 무성을 공격하였고, 이때 진나라의 번오기는 조나라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를 거두었다. 번오기는 북상하면서 한단의 배후까지 들이쳤지만, 조나라는 이목을 대장군으로 하여 맞서 싸웠다.

당시 이목은 진지를 높게 구축하여 방어만 하고 싸움에는 응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이때부터 먼 길을 와서 보급선이 취약했고, 장기전으로 갈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이에 번오기는 싸울 수밖에 없는 입장에 내몰리자 주력으로 비하를 공격하였고 이때 그는 비하를 조나라가 구원하러 올 때 격파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목은 이를 역이용하여 조나라 군대는 진군의 진지를 기습하여 점령했고, 진나라 주력군 대부분은 비하를 공격하느라 방어를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진나라는 보급선이 끓기는 소식을 듣자 황급히 퇴각하나, 이를 예상한 조나라 군대에게 기습을 당하고 비 전투에서 진나라군대 10만명이상이 섬멸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진나라의 번오기는 이 패배 이후 두려움에 연나라로 도주하면서 2,3차 공격은 조나라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3) 4차 공격 그리고 제나라와의 동맹 실패

진나라는 기원전 232년 업성과 태원 남북으로 나눠서 조나라를 침공하는데, 조나라는 이때 다시 이목을 대장군으로 하여 방어를 한다. 하지만 조나라는 자연재해로 인해 농작물 수확이 어려웠고, 진나라와의 전쟁으로 국가는 피폐해져 갔다. 조나라 입장에서는 빠르게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이에 조나라는 남쪽을 사마상이 막으면서 이목은 주력으로 북쪽으로 가서 진나라 군을 격퇴하였고, 원래 진나라는 남북 양쪽에서 동시에 진군하기로 하였으나, 북쪽에서 패배 소식을 들은 남쪽 군도 패배 소식을 들으면서 퇴각하게 된다. 이로써 4차 공격은 끝나는데 조나라도 당시에 타격이 막대하여 더 이상 반격을 할 수는 없었다. 

조나라는 진나라를 막기 위해 제나라의 물적, 인적자원을 활용하기 위하여 동맹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이 소식은 진나라에게도 들어갔고, 진나라는 이를 방해하기 위해 금은보화를 이용하여 제나라 관료들을 매수하여 동맹은 실패하게 되었다. 이때 가뜩이나 어려운 조나라는 더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된다.

 

2. 가장 약한 국가 매수에 의해 망하다 - 한(韓)

한나라는 이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매우 약한 국가였다. 조나라의 공격이 번번이 실패하자 진나라의 시황제는 율료의 간언을 받아들여 직접공격과 동시에 다른 6개 국가의 신하들을 매수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당시에 약 30 만금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진나라 국고의 거의 전부였고, 시황제는 그를 믿고 매수 작업을 허가하였다.

이에 첫 번째 목표가 된 한나라는 영토 대부분을 이미 잃었고 남은 영토는 고작 수도 신정과 양적(남양)이라는 도시 밖에 없었다. 이때 남양의 담당 관리는 등이라는 자로 한나라의 귀족도 아니고 충성도가 낮은 사람이었고, 적극적으로 매수공작을 펼치면서 기원전 231년 남양태수가 남양을 통째로 진나라에 받치게 된다. 진나라는 남양을 얻어 등을 태수로 세우며, 말 그대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땅을 얻는다. 남양은 바로 진나라의 전진공격기지가 되었고, 기원전 230년 등을 내사로 임명하여 10만의 진나라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한나라 수도 신정을 포위하였다.

한나라는 이미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고, 기존에 항복한 자들도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전부 투항을 고려하였다. 한나라 왕인 안은 항복권유를 받고 후작지위 보전을 약속했다. 이에 한나라는 내부적으로 토의를 거친 뒤 결국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진나라에 항복하고 한나라는 멸망한다.

한나라 멸망 후 약속과 다르게 왕을 황산으로 유배시켰고, 진나라 관리들을 파견하여 수도인 신정을 통치하였다. 한나라 군사는 전부 진나라에 편입되고 귀족들은 쫓겨나고 영지도 대부분 몰수당한다. 진나라의 이러한 모습에 한나라 구 귀족들은 불만을 가지고 내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후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이 단순히 힘에 의해 멸망하기보다는 내부의 중요 대신들 대부분이 매수당하게 되어 가뜩이나 명장들이 겨우겨우 버티면서 방어하는 순간 내부에서 판단력을 잃으면서 충신들을 내치게 되니 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편에는 진나라의 통일과정 2번째 이야기인 조나라의 멸망부터 다루고자 한다.

1. 진나라의 개요

진(秦)은 진한시대로도 유명한 중국의 최초의 통일왕조이다. 그 역사는 매우 깊은데 서주에서 동주로 바뀌는 전국시대 전국 칠웅국가로 존재하였다. 진은 중국에서 가장 척박한 땅 중 하나인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런 위치 때문에 초기에는 수많은 중원국가들의 무시를 받았지만,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솔하여 서부의 이민족들은 제압하고 국력을 키워나가면서 주변의 제후국들을 하나씩 제압을 해나갔다.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하고 안정을 찾아야 했으나,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 공사 등으로 나라의 국운이 급격하게 기울었으며, 후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여 2대째에 전국에서 다시 반란의 불길에 휩싸이고 3대 황제인 자영 때에 멸망하고 만다. 

진나라는 빠른시간에 멸망하였지만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여, 말 그대로 중국이라는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기틀을 다졌고, 한나라도 진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오랜 기간 존속하여 사실상 이 시기를 진한의 시기로 불리기도 한다. 더불어 중국의 진이 훗날 서양의 China의 어원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당시 진나라는 짧았지만 후대에 미친 영향은 중국의 그 어느 왕조보다도 강력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진나라의 탄생

진나라는 서주시대 때 대부로 영지를 하사 받아서 가문이 세워졌고,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가 되었으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중원 제후국과 크게 다른 문화를 보여 야만의 나라로 불렸다. 그러나 내부 실상은 당시와 달랐는데, 순자는 당시 진나라를 방문하여  남긴기록에서 진나라가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률하에서 백성들이 순종적으로 맡은 일을 한다는 점이었고, 진나라에 유학자가 없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았다. 이는 진나라 민족의 절반은 서융족으로 사방의 이민족들과의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라의 분위기가 군국주의적인 분위기로 굳어졌었다.

진나라는 춘추시대에는 변방의 소국에 불가하였으나, 동주시대로 넘어가면서 왕을 도운 공로를 인정 받아서 서방을 제패하기 시작하였고, 진 목공 때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피폐하던 시기에 많은 인구가 중원에서 유입되고,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진정한 서방의 패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진(晉)은 당시에 늘 라이벌관계였고, 중원진출을 위해서도 넘어야 할 큰 산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진(晉)은 춘추의 패자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고, 서로 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진(晉)이 더 유리한 형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진(秦)은 위수지역을 끼고 있어서 해당지역은 비옥한 황토지역으로 농사짓기에 용이하였으며, 덕분에 전반적인 세력싸움에서는 밀렸지만, 방어를 착실히 해나가면서 국력을 쌓아가면서 때를 기다렸다.

 

3. 진나라 전국을 통일하기 위해 뛰어들다

진나라의 위와 같은 기반하에서 상앙의 개혁정책으로 진나라는 급속도로 바뀌었는데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진나라를 법치 이념으로 나라를 뜯어 고쳐서 최강대국으로 만들었고, 원교근공 즉 멀리 있는 나라와는 교류하고 근처에 있는 나라는 공격한다는 외교정책으로 나아갔고, 당시 첫  상대가 위나라였는데 전국시대 때 위나라는 강했으나, 위치상으로 중국 한가운데에 있어서 사방으로 공격을 받았고 기원전 342년 마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진나라는 위나라의 위세를 완전히 꺾어놨다. 진나라는 위의 전투를 기반으로 하서 및 하동지방을 정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진령산맥 인근에 그 유명한 천혜의 요새인 함곡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16년 운명을 바꾼 파촉 정벌을 진행하였다. 이는 중국 통일에 매우 결정적이였는데,  당시 전국시대에 가장 강한 두 국가가 진과 초나라였고, 사실상 지리적 이점 및 경제적 생산력을 봤을 때 비슷하다면 결국 파촉을 먼저 점령하여 그 이점을 가져가는 국가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초나라는 이러한 생각을 미처 못하던 시기에 진나라가 앞서 나가면서 파촉 점령을 통해 생산력 증가 그리고 장강 상류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 우위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전국시대의 진나라는 전국의 다른 6개 국가들이 모두 연합을 해야 겨우 맞설 수 있는 수준이였다. 초나라는 진나라와 단독으로 싸울 때마다 연전연패하였으며, 한나라 위나라 연합을 하여도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국면이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원교근공으로 근처에 있는 국가들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다. 진나라도 다른 국가들처럼 왕들이 늘 통치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파국으로 이끌지는 않았고, 안정적으로 국가를 유지해 나갔으며, 영정이 즉위하면서 왕권을 대폭 강화시키고 승상으로 이사를 등용하고 한비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를 지속적으로 개혁함에 따라 전국시대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본격적인 통일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진나라의 통일 준비는 단순히 국가들간의 전쟁뿐만이 아니라 군사력부터 정치력, 외교력, 경제력까지 밑바탕 갖춰서 완전히 적국을 제압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나라는 거듭 성장함에 따라 정치, 군사 정책도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진나라의 영토는 전국시대 모든 영토에서 3분의 1, 경제력은 10분의 6 그리고 인구는 10분의 3을 차지했다. 그래도 진나라는 그럼에도 개혁을 거듭하여 진시황의 즉위 이후 다른 국가들의 백성을 적극 받아들이며, 무분별한 살육은 최소화하였고, 전쟁으로 잡은 포로들을 진나라의 노동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국가사업 대규모로 일으켜서 국력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중 정국거라는 관개수로를 건설하여, 관중지방에 엄청나게 비옥한 농경지가 생겨나게 되었고, 당시 농지에서 생산된 곡식의 양이 약 4천만 섬 이상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진나라의 통일전쟁 기간 중에 수십만의 대군을 운용하면서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러한 경제력 외에도 첩보전에도 능하여 이사, 울료 등을 중용하여 타 국가들의 중요대신들을 매수해 왕과 대신들 간에 이간질을 조장하며,  합종을 막고, 내부적으로 적국들을 악화시켜 진나라는 비교적 손쉽게 통일전쟁을 할 수 있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편에서는 진나라의 천하통일 전쟁을 다루고자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