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나라 말기 앞서 말했던 봉건제도가 약해지고, 각 제후들이 급격하게 성장함에 따라 주나라의 통치력은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공신과 친족들이 세운 제후국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게다가 주나라 근처의 이민족들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었으며, 주나라는 지리적으로 비교적 서쪽에 있어서 점차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봉화가 있었지만 주나라를 통치하던 왕이 정사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한 여인 포사의 마음을 사기에 급급하였으며, 포사의 웃음을 얻기 위해 유사시에 올리던 봉화를 이용해서 제후들을 상시 소집하였고, 양치기 소년과 같이 제후들은 점차 주나라 왕실에 대한 신뢰를 잃어 갔다.
이러한 봉화 사건으로 인해서 막상 서쪽 이민족인 견융족의 침략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봉화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제후들 어느 누구도 참전하지 않으면서 주나라 혼자서 수도를 방어해야 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당시 수도였던 호경(현재의 西安)이 공격을 받아서 함락되고, 기원전 771년 평왕 때 결국 서쪽 호경에서 동쪽 낙읍으로 천도했는데, 주 왕조가 낙읍(현재의 洛陽)으로 천도하기 전의 시대를 서주시대, 그 이후를 동주시대라고 불린다. 그리고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로 나누어지며, 그중에서 오늘 이야기하는 춘추시대는 천도 후, 기원전 403년 진(晉) 나라의 유력 대부(大夫)인 한(韓)· 위(魏)· 조(趙) 세 개 가문이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하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2. 춘추시대 초기
주나라는 천도 이후 수 많은 제후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수도를 약탈당함으로 인해 천자의 권위 실추는 물론 주나라 본거지도 잃고 전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상실하여, 춘추시대의 주나라는 제나라와 진나라 같은 강대국의 힘에 의존하여 이름뿐인 왕실만 남게 된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정나라가 두각을 보였는데, 정나라의 시조는 바로 정환공으로 정환공은 주나라에서 중요 벼슬을 하며, 견융족 침입 당시 주유왕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이 정무공이 이었고, 그는 동괵을 합병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정나라의 전성기는 정무공의 아들 정장공인데, 그는 기원전 743년에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에 정나라는 이미 세력이 커서 주평왕도 쉽게 건드릴 수가 없었으며, 주환왕 때에는 정장공을 배척하고 정사를 괵공에게 맡기려 하자, 이에 분노한 정장공은 주나라 왕실의 곡식을 수탈하며 보복한다. 이렇게 상호 간에 틀어질 때로 틀어진 상황에서 기원전 707년 주나라에서 직접 몇몇 제후들을 모아서 정나라 정벌에 나섰지만, 수갈에서 대패하고 환왕 본인도 화살에 맞으며 주나라는 완전히 몰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외에도 정장공은 중원에서 각 제후국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초기의 패자로 군림하는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정장공이 사후 급격하게 몰락하게 되고 정나라 내부에서 승계 다툼이 벌어지는 동안 주변의 제나라와 초나라 국력이 급격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정나라는 지리적으로도 수 많은 제후국에 둘러 쌓여 있어서 나중에는 모든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3. 춘추시대 중기
춘추시대 중기는 정나라 이후로 보통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시대를 말하며, 후기는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 시기로 나눠 보면 될 듯하다. 이들은 제후들 간의 맺어진 회합이나 맹약, 즉 회맹을 열어서 맹주가 된 패자 국가로 5인의 패자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불린다.
제나라 환공(재위 기간 기원전 685~643년)은 양공의 이복동생으로 즉위하여, 춘추시대 유명한 포숙을 등용하였고, 포숙의 조언을 받아 관중을 등용하였으며, 이때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말하는 '관포지교'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무렵 초나라가 지속적으로 북진을 하였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제나라는 중원의 연합을 구성하여 반격을 가하였고, 양쪽 간의 담판을 통해 초나라가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함에 따라 중원의 평화를 지켜냈다. 그 외에도 제나라는 북쪽으로는 산융, 남쪽으로는 초나라, 서쪽에서는 회맹을 개최하며 그 세력을 키웠다. 또한 진나라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자 직접 개입하여 진정시키는 명실상부한 패자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제나라의 환공과 관중이 죽고, 환공의 패업은 본래 환공과 관중 두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졌기에 그 둘이 죽자 제나라는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제나라는 춘추 더 나아가서 전국시대까지 오패와 칠웅으로 남게 되나 이후에는 다시 패업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춘추시대의 제2의 패자는 진(晉)나라의 진문공(재위 기간 기원전 635년~기원전 628년)으로 그는 아버지 헌공이 여융을 토벌하고 잡아온 여비를 사랑하였고, 이에 여비 소생의 자녀를 후계자로 삼아서 태자를 죽이고, 진문공과 그의 아우를 추방 하였다. 진문공은 이때 국외 19년간 체류하다가 진(秦) 목공의 도움을 받아 진(晉)으로 돌아와서 62세에 뒤늦게 즉위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해외 체류 중에 선진, 가타, 조쇠, 호언 등의 수 많은 현사들을 중용하였고, 그들의 헌책에 따라 주나라 양왕을 도와서 난을 평정하였고, 송나라의 원조 요청을 받아서 초나라 세력을 성복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뒀고, 기원전 632년 제후들을 규합하여 초나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의 환공에 이어 제2의 패자가 되었다. 그는 나이가 연로하여 재위는 8년이였지만 신하에 유능한 인재가 많아서 사후에도 오랜기간 패자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초(楚)나라의 장왕(재위 기간 기원전 613~591년)은 제3의 패자가 되었다. 그는 초나라 목왕의 아들로 즉위 초부터 귀족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이민족들을 정벌하였다. 내부적으로는 내정을 개혁하여 상벌을 분명히 함에 따라 군신이 화목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즉위 후 신하들에게 '간언 하는 자는 처형하겠다'라고 선포하자 3년 동안 주색에 빠졌고, 당시 충신인 소종과 오거 등이 그 와중에 간언을 하였으며, 이후 그는 부패한 신하들을 몰아내고, 충신들을 중용하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기원전 611년 용나라 정복, 608년 송나라 정복, 606년 낙양 부근의 융족까지 토벌하는 등 그 세력을 떨쳤다. 장왕은 중원을 제패하려고 낙수 주변에 주둔하였고, 주나라는 장왕에게 구정을 선물하였다. 당시 주나라의 사자로 갔던 왕손만이 꾀를 내어서 장왕에게 천명은 주나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에 장왕은 군대를 철수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서나라, 진(陳)나라를 정벌하였고, 정나라를 공격하면서 진(晉)나라의 원군을 대파하면서 명실상부한 패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다. 이처럼 초나라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원 패권을 장악하며 제3의 패자로서 그 맹위를 떨칠 수 있었다.
다음 편은 나머지 2패인 오나라 및 월나라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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