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燕)

전국 칠웅 중에서 가장 북방에 위치한 연나라. 연나라는 우리나라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은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도 잦았다고 하며, 이는 당시 연나라가 전국칠웅에서 크게 힘을 못쓰고 확장이 어려워서 그랬다고 볼 수 있다. 연나라는 전국시대 중기에 명재상 소진을 앉혔고, 그는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연합하는 합종책을 세워서 진나라를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연나라는 이후 내부적으로 승계문제로 인해서 다툼이 있었고 반란이 발생하였다. 왕이 죽은 틈을 타서 근처의 강대국인 제나라의 민왕이 쳐들어 오면서 연나라는 당사 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결국 연나라는 한나라에 피신한 한 공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연나라의 강대국을 이끈 소양왕이었다. 소양왕은 단기간에 강대국으로 가기 위해 곽외라는 자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그는 옛날에 어느 왕이 천리마를 가지고 싶을 때 신하에게 천금을 주었는데, 그 천금으로 천리마가 아닌 천리마의 뼈를 사 왔고, 당시 신하는 천리마의 뼈를 천금 주고 살 정도면 많은 이들이 천리마를 더 비싸게 쳐줄 것으로 생각해서 팔려고 몰려들 것이라고 했고, 왕은 결국 천리마 3 필이나 얻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교훈 삼아서 곽외를 중용한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자신의 재능을 표출하고 싶은 수많은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악의를 기용하여 제나라 성 2개 빼고 전부 함락시켜 멸망 일보 직전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후손인 혜왕은 매우 어리석었으며, 전단의 이간계로 악의를 내쳤으며, 제나라는 다시 성들을 수복하였다. 이후 조나라와도 자주 분쟁하면서 국력을 소모하였고, 잦은 패배를 반복하면서 결국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연왕 희때 태자 단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객인 형가를 보내서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기원전 222년 진나라에 멸망당하게 된다.

2. 제( 齐)

제나라는 앞서 춘추오패에서도 언급했듯이 강국이었다. 제나라는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가문의 성씨가 강씨 성에서 전 씨 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나라는 전국시대 때 선왕때 병법 전문가인 손빈을 등용하면서 점점 강해졌고, 민왕 때는 진나라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한때 왕보다 높은 칭호를 사용하는 위세를 부렸으나 연나라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 연합군에 의해 2 개성 빼고 전부 잃는 치욕을 겪었다.
민왕 자신도 거성에서 버티다가 초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초나라는 장수 요치를 파견하여 민왕을 도왔고, 민왕은 이때 그를 재상으로 앉히는 실책을 보였다. 요치는 본색을 들어내 민왕을 죽이면서 제나라를 삼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전란 속에 늘 영웅이 태어나는 것처럼 민왕의 세자를 찾아 내어 그가 양왕으로 즉위하고, 즉묵에 있던 제나라 왕족이자 명장인 전단이 군사를 이끌면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전단은 계책을 써서 연나라 명장이 악의가 실각하게 만들었고, 새로 대장으로 임명된 기겁을 격파하면서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70여성을 모두 수복하는 큰 전공을 세운다. 하지만 이미 큰 타격을 받았던 제나라는 이후 예전만큼의 강대국이 될 수는 없었고, 기원전 221년 제왕 건때 진시황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제나라는 개인적인 사견으로 이야기하고 싶은게 있는데, 제나라는 다른 강국들과 다르게 비록 성씨는 바뀌었지만 나라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삼가분진 전의 진나라는 강했지만 세 국가로 쪼개지면서  국력이 약해지고 중원에 있어 침략이 잦았고, 연나라는 너무 북방의 척박한 땅에 있으면서 춘추시대 때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초나라는 영토는 넓었지만 대부분 미개발지에 숲과 습한 기후로 당시에 발전하시 어려웠다. 제나라는 이런 국가들과는 다르게 뒤로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방비에도 유리했고, 기후 또한 양호하여 농사짓기에도 좋아서,  춘추전국시대 전체적으로 강대국으로 계속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제나라가 결국 지리적으로 진나라에 밀렸는데 제나라는 바다가 천연의 요새이자 성장성의 한계가 되는 부분이었다. 인접 국가들도 제나라까지 들어오는 길은 평탄하여 극적으로 확장해나가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진나라는 서쪽으로도 뻗어나가고 이민족들을 제압하여 확장의 기반을 늘리고 함곡관을 통해 철통 같은 방어막 그리고 지금의 사천성인 익주 지역을 차지하면서 인력 및 물자는 풍부하였고, 국력의 손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양국의 확장성이 결국에는 천하통일의 운명을 갈랐고, 이렇듯 제나라의 위치는 애초에 천하통일을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본다.

3. 초(楚)

초나라도 제나라처럼 춘추시대때부터 그 명성을 이어오던 강대국이었고, 영토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초나라는 영토 대부분이 미개발지였다. 오늘날의 러시아가 대부분 영토가 미개발지인 것처럼 초나라 영토 대부분은 수풀이 우거지고 늪지대도 많은 미개발지였다. 실제로 장강 이남의 개발은 실질적으로 위진남북조 시대에 와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나라의 전성기는 초도왕때 오기를 등용하여 개혁을 이루고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초도왕 사후 보수 귀족세력에게 오기가 죽임을 당하면서 약해지는 듯했으나, 월나라를 멸망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이런 사건 말고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암군들이 즉위함에 따라 전반적인 국력은 진나라와 제나라를 따라가지 못했고, 천도를 3번이나 하면서 불안정한 정국을 이어갔다. 초나라는 마지막 명장인 항연까지 버텨보지만 초왕 부추가 생포되면서 멸망했다.

초나라는 위의 제나라처럼 영토가 제일 큰 나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왜 멸망을 하였을까? 초나라 영토 대부분은 지금의 호남, 광동, 운남성 지역으로 지금은 대부분 지역이 고도로 발달되어있고, 호남은 삼국시대에는 형주지역으로 제후들의 다툼이 많은 중요 요충지였다. 그러나 그때 당시 강남은 중원의 중심이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개발은 더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땅 대부분은 미개간지인 늪지대로 사용이 어려웠고, 당시의 농업기술로는 해당 지역은 개발이 불가능하고 인구밀도 또한 밀집되어있지 않았다. 이에 국력은 자연스럽게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군주들이 대부분 힘이 없었고, 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점 또한 초나라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었다.

 

전국시대는 결국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완벽한 지리적 요건, 리더십 있는 군주 그리고  풍족한 경제력을 갖춘 진나라가 승자가 되는데 다음 편에는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이자 중국사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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