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춘추시대 후기

춘추시대 후기는 중국의 동남쪽에서 오나라와 월나라가 주인공이 된다. 4번째 춘추의 패자는 바로 부차(夫差)(재위 기간 기원전 496년부터 473년)이며, 그의 아버지는 5번째 패자가 되는 월왕 구천에게 패해서 죽었다. 이때 오나라의 부차는 섶나무 위에서 복수를 다짐하였고 기원전 494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구천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때 당대 유명한 책사인 오자서가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전언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 않았고, 동시에 월나라의 범려는 당시 절세의 미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쳤고, 구천이 회계산에서 근신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당시 오자서의 충언을 듣지 않은 그는 북진정책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였고, 구천은 칼을 갈은 끝에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부차는 구천에게 화의를 요청하였으나, 구천은 그를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오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으며, 부차는 오자서의 충언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며 자살하고 만다.

춘추의 마지막 패자는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재위 기간 기원전 496년부터 465년)이다. 그는 부친의 대를 이어 왕위를 받고 바로 오나라와 전쟁하여 부차의 아버지인 합려를 죽였다. 부차는 이때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섶나무 위에서 자면서 복수심을 불태웠다. 이후 구천은 오나라에 패배하여 회계산에 숨었다가 결국 오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패배를 기억하며 회계산에서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이 두 가지의 일화가 합쳐져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구천은 끝내 부차를 꺾었고, 서주에서 여러 제후들을 모아서 회맹 하였고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자신을 살려낸 충신 범여를 추방하고, 또 다른 충신인 문종을 자살하게 하는 실정을 일삼았고, 이에 월나라의 패권은 자연스럽게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다. 또한 월나라 바로 옆에 있던 초나라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였고, 이전에는 오나라와 같이 초나라를 견제할 수 있었으나, 오나라까지 망하면서 월나라 혼자서 온전하게 초나라를 계속 막아야 했으니 초나라의 압박으로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면서 해상교통로를 잃으면서 점차 몰락하게 된다. 이러한 오나라와 월나라는 적이면서 동시에 초나라를 같이 막아내는 운명의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상호 간의 적대 관계 속에서 같은 배를 탄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 http://www.doopedia.co.kr

2. 전국시대의 시작

전국시대의 시작은 모두들 다양한 시각이 있으며, 첫 번째 시작은 진(秦)나라의 군주 여공공이 즉위한 시점으로 보는 시작이 있었으며, 두 번째는 기원전 453년 진(晉) 나라의 유력 호족인 조간자, 위환자, 한강자가 가장 강한 호족인 지백을 죽이고 일족을 몰살하는 내전 이후,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로 분할되는 시점으로 본다. 마지막은 제나라의 성씨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교체되는 연도를 기준으로 보는 3가지 시작이 주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국시대의 시작은 바로 성씨가 바뀌는 즉, 기존 가문들의 교체나 멸망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춘추시대의 주나라는 역사와 종교적 권위는 있었고, 각 나라들이 천자 밑의 제후로 주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 유력한 제후국들은 멸망 없이 그 존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주나라의 천자로서의 힘은 완전히 상실하였고, 모든 제후국들이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힘이 좌지우지하게 되는 끝없는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살아남은 강대국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렸으며, 이들 일곱 국가가 바로 연(燕)나라, 제(齊)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초(楚)나라, 진(秦)나라이다.

 

3. 전국칠웅(戰國七雄)

(1) 한(韓)

전국칠웅 중에서 후에 통일하게 되는 진나라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한나라는 건국 후 기원전 355년 신불해라는 명재상을 등용하여 건국 초기에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으나, 지리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진나라와 초나라의 압박을 받았다. 또한 이궐전투에서 한나라와 위나라 연합군 약 20만 이상이 진나라 명장 백기에게 몰살당했고, 이 사건으로 한나라뿐만이 아니라 위나라까지 몰락하게 된다. 또한 영토 북쪽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압박으로 계속해서 영토를 잃어갔으며, 전국칠웅 중에서도 가장 약한 국가로 자리 잡게 된다. 결국 지리적인 불리함 그리고 수십만의 경제생산 가능한 인구의 몰살은 고대사회에서 그 나라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결국 진나라의 통일 전쟁에서 첫 번째로 멸망당하게 된다.

 

(2) 위(魏)

위나라는 전국시대 칠웅 중에서 강대국 중 하나였다. 초기에 오기, 서문표 등의 명장을 등용하고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서하 지역을 빼앗아서 영토를 확장함과 동이세 국력이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이에 전성기에는 음진전투에서 5만의 군사로 진나라의 50만 대군을 격파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앙의 법가사상을 받아들인 진나라가 크게 성장하고, 오기가 위나라를 떠났고, 서쪽 지역의 영토를 점차 진나라에게 잃었다. 서쪽 지역을 상실할 때쯤 수도를 대량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천도 이후에도 내부적으로 혼란만 지속되었고 특히 혜왕시기에는 전투에서 패전이 계속되었으며, 기원전 342년에 마릉전투에서 제나라에게 크게 패하면서 완전히 기울어진다. 또한 나라의 운이 다했는지 인재 등용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주변 국가들의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악의, 범수, 손빈, 상앙 등 모두 위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못했다. 이렇게 몰락한 위나라는 끝내 기원전 225년에 진나라에게 멸망당한다.

 

(3) 조(趙)

조나라 역시 전국시대 칠웅 중에서도 강대국이었고, 위치가 북방에 위치하여 기마 전술을 도입하는 등 군사기술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조나라는 주변의 소국들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하며, 진나라를 압박하였는데 그들은 진나라의 북부지역 전반적으로 포위 해나가는 형태로 압박을 가하였다. 조나라는 무령왕하고 혜문왕때가 전성기였는데, 이 시기에 조나라의 명장 유명한 명장들인 염파, 이목, 인상여 등을 등용하였고, 지리적으로 진나라 바로 윗쪽에 위치하였고, 군사력 또한 기마전술을 이용해 크게 성장해나감에 따라 실질적인 적수가 없던 진나라의 유일한 경쟁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강하던 조나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유능한 인상여 등의 인물들이 노쇠하여 죽고, 염파는 홀로 진나라와 싸우다가 모함을  받아서 초나라로 쫓겨나면서 쇠퇴하는데,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주장이 염파에서 조괄로 바뀌면서 진나라에게 대패하였다. 이때 무려 40만 이상의 병사들이 모조리 몰살당하고, 군주들이 하나 같이 무능하였기에 최후의 명장들이 진나라를 반격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기원전 229년에서 228년경에 한나라 이후 대대적인 진나라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단이 함락되었다. 이후 세자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반격을 도모해보지만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복귀하는 왕전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다음 편에서는 전국칠웅의 3개 국가 그리고 전국시대 최후의 승리자인 진나라의 여정을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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