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나라의 개요
진(秦)은 진한시대로도 유명한 중국의 최초의 통일왕조이다. 그 역사는 매우 깊은데 서주에서 동주로 바뀌는 전국시대 전국 칠웅국가로 존재하였다. 진은 중국에서 가장 척박한 땅 중 하나인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런 위치 때문에 초기에는 수많은 중원국가들의 무시를 받았지만,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솔하여 서부의 이민족들은 제압하고 국력을 키워나가면서 주변의 제후국들을 하나씩 제압을 해나갔다. 진나라는 전국을 통일하고 안정을 찾아야 했으나,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 공사 등으로 나라의 국운이 급격하게 기울었으며, 후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여 2대째에 전국에서 다시 반란의 불길에 휩싸이고 3대 황제인 자영 때에 멸망하고 만다.
진나라는 빠른시간에 멸망하였지만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여, 말 그대로 중국이라는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기틀을 다졌고, 한나라도 진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오랜 기간 존속하여 사실상 이 시기를 진한의 시기로 불리기도 한다. 더불어 중국의 진이 훗날 서양의 China의 어원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당시 진나라는 짧았지만 후대에 미친 영향은 중국의 그 어느 왕조보다도 강력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진나라의 탄생
진나라는 서주시대 때 대부로 영지를 하사 받아서 가문이 세워졌고, 춘추전국시대에 제후가 되었으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중원 제후국과 크게 다른 문화를 보여 야만의 나라로 불렸다. 그러나 내부 실상은 당시와 달랐는데, 순자는 당시 진나라를 방문하여 남긴기록에서 진나라가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률하에서 백성들이 순종적으로 맡은 일을 한다는 점이었고, 진나라에 유학자가 없다는 점은 단점으로 꼽았다. 이는 진나라 민족의 절반은 서융족으로 사방의 이민족들과의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라의 분위기가 군국주의적인 분위기로 굳어졌었다.
진나라는 춘추시대에는 변방의 소국에 불가하였으나, 동주시대로 넘어가면서 왕을 도운 공로를 인정 받아서 서방을 제패하기 시작하였고, 진 목공 때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피폐하던 시기에 많은 인구가 중원에서 유입되고,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진정한 서방의 패자로 등극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진(晉)은 당시에 늘 라이벌관계였고, 중원진출을 위해서도 넘어야 할 큰 산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진(晉)은 춘추의 패자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고, 서로 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진(晉)이 더 유리한 형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진(秦)은 위수지역을 끼고 있어서 해당지역은 비옥한 황토지역으로 농사짓기에 용이하였으며, 덕분에 전반적인 세력싸움에서는 밀렸지만, 방어를 착실히 해나가면서 국력을 쌓아가면서 때를 기다렸다.
3. 진나라 전국을 통일하기 위해 뛰어들다
진나라의 위와 같은 기반하에서 상앙의 개혁정책으로 진나라는 급속도로 바뀌었는데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진나라를 법치 이념으로 나라를 뜯어 고쳐서 최강대국으로 만들었고, 원교근공 즉 멀리 있는 나라와는 교류하고 근처에 있는 나라는 공격한다는 외교정책으로 나아갔고, 당시 첫 상대가 위나라였는데 전국시대 때 위나라는 강했으나, 위치상으로 중국 한가운데에 있어서 사방으로 공격을 받았고 기원전 342년 마릉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진나라는 위나라의 위세를 완전히 꺾어놨다. 진나라는 위의 전투를 기반으로 하서 및 하동지방을 정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진령산맥 인근에 그 유명한 천혜의 요새인 함곡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316년 운명을 바꾼 파촉 정벌을 진행하였다. 이는 중국 통일에 매우 결정적이였는데, 당시 전국시대에 가장 강한 두 국가가 진과 초나라였고, 사실상 지리적 이점 및 경제적 생산력을 봤을 때 비슷하다면 결국 파촉을 먼저 점령하여 그 이점을 가져가는 국가가 우위를 점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초나라는 이러한 생각을 미처 못하던 시기에 진나라가 앞서 나가면서 파촉 점령을 통해 생산력 증가 그리고 장강 상류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 우위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전국시대의 진나라는 전국의 다른 6개 국가들이 모두 연합을 해야 겨우 맞설 수 있는 수준이였다. 초나라는 진나라와 단독으로 싸울 때마다 연전연패하였으며, 한나라 위나라 연합을 하여도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국면이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원교근공으로 근처에 있는 국가들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다. 진나라도 다른 국가들처럼 왕들이 늘 통치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파국으로 이끌지는 않았고, 안정적으로 국가를 유지해 나갔으며, 영정이 즉위하면서 왕권을 대폭 강화시키고 승상으로 이사를 등용하고 한비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국가를 지속적으로 개혁함에 따라 전국시대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본격적인 통일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진나라의 통일 준비는 단순히 국가들간의 전쟁뿐만이 아니라 군사력부터 정치력, 외교력, 경제력까지 밑바탕 갖춰서 완전히 적국을 제압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나라는 거듭 성장함에 따라 정치, 군사 정책도 변화를 맞이한다. 당시 진나라의 영토는 전국시대 모든 영토에서 3분의 1, 경제력은 10분의 6 그리고 인구는 10분의 3을 차지했다. 그래도 진나라는 그럼에도 개혁을 거듭하여 진시황의 즉위 이후 다른 국가들의 백성을 적극 받아들이며, 무분별한 살육은 최소화하였고, 전쟁으로 잡은 포로들을 진나라의 노동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국가사업 대규모로 일으켜서 국력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중 정국거라는 관개수로를 건설하여, 관중지방에 엄청나게 비옥한 농경지가 생겨나게 되었고, 당시 농지에서 생산된 곡식의 양이 약 4천만 섬 이상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진나라의 통일전쟁 기간 중에 수십만의 대군을 운용하면서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러한 경제력 외에도 첩보전에도 능하여 이사, 울료 등을 중용하여 타 국가들의 중요대신들을 매수해 왕과 대신들 간에 이간질을 조장하며, 합종을 막고, 내부적으로 적국들을 악화시켜 진나라는 비교적 손쉽게 통일전쟁을 할 수 있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편에서는 진나라의 천하통일 전쟁을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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