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나라는 상나라 이후,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존재한 국가로, 주나라는 기존의 왕조와 다르게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서주와 동주로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771년까지 수도를 호경(현재의 시안(西安))에 두어서 '서주(西周)'라 칭하고, 기원전 771년 ~ 기원전 256년까지 수도가 낙읍(현재의 뤄양(洛阳))으로 천도되어서 '동주(东周)'라고 칭한다.
앞으로도 후술하겠지만, 중국의 왕조별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게 가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혼란을 겪으며 수도 천도가 자주 발생하여 동서 혹은 남북으로 같은 왕조이나 다른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주나라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역사다운 역사가 시작된 왕조였다. 또한 중국의 천문, 인문, 다양한 사상 그리고 당시 뛰어난 문화적 발전으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점은 매우 높게 평가된다.

역사서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841년 전의 주나라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하며, 이는 기원전 841년 폭정을 일으켰던 주나라 여왕이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828년까지 혼란한 공백기가 있었으며,  당시에 수많은 사료들이 소실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사기》에서는 해당 시기를 공화시대(共和时代)라고 칭한다. 또한 이를 기점으로 삼아서 기년(紀年)으로 삼았으며, 이 시기부터는 연대 기록이 상세하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 문헌을 통하여 주나라 역사를 상고할 수 있는 시작점은 기원전 841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2. 주나라의 건국


주나라는 문왕때 나라의 틀을 갖추었으며, 무왕 대에 상나라 목야의 대회전을 통해 주왕을 몰아내고 상나라의 전역을 차지하였다. 이후 무왕의 아들이 어려서 숙부인 주공 단(周公旦)이 다스렸으며, 성왕이 성년이 된 후 이어받아서 즉위하여 성왕과 강왕 시대에 통치 체계가 완성되었다.
주나라는 건국할때부터 완전히 독자적 힘으로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연합은 여러 세력이 함께 행동했기에 가능했다.
실제 주나라는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주위의 세력들을 원활하게 관리 할 방법이 필요했다.
실제 주나라는 상나라를 멸망 시킨 뒤에도 상나라의 잔존 세력을 달래야 했다. 이는 실제 전투에서 상나라 군사가 주나라보다 훨씬 많았던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나라는 상나라의 왕족인 미자계라는 자에게 제후로서 작위를 주었고, 그는 송나라를 만들었다. 송나라는 주나라 밑에 있었으나 그 세력은 강했으며,  낙읍지역은 주나라 시대에도 제2의 수도로서 역할을 했다.


3. 중국고대사를 함께한 봉건제도의 시작

 

중국에서는 역사를 가르칠 때 고대사회(청나라 중기까지)는 봉건사회라고 가르치며, 근대사회는 반봉건반식민지사회(半封建半殖民地社会)라고 가르친다. 이는 봉건제도와 함께 시작된 중국의 봉건사회는 고대사 내내 뿌리를 내려왔으며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왔다고 분석할 수 있다.
상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나라는 상나라를 통제하기 어려웠으며, 고대 국가로서도 강한 힘이 없었으며, 중앙집권화 된 사회라고 볼 수 없었다. 주나라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건국에 힘쓰고 통치에 기여함과 동시에 본국에 우호적인 공신이나 가문의 친척들에게 작위 및 영지를 수여하고, 각자의 영지를 통치하도록 정당성을 부여하여 유지 및 관리를 하는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주나라 시대의 봉건제도의 기틀은 다음과 같다. 중앙에는 왕이 최고 통치자로 있으며, 그 밑으로는  공, 후, 백, 자, 남의 순으로 5단계의 작위를 부여하였다. 주나라 왕실은 당시 유력 세력과의 친밀도, 군공, 그리고 전략의 중요도 등을 고려하여 왕이 직접 책봉을 하였다. 이때 후의 작위가 많았으며 이에 제후(諸侯) 즉, 여러 명의 제후들이라는 뜻이 생겨났다. 제후들은 모두 각자의 나라(영지)를 받아 국(國)이 생겨났다. 제후들은 자신의 휘하에도 유능한 수하들 그리고 공신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대부 혹은 경 불렸으며, 가(家)를 받았다. 이들 밑에는 또다시 사(士) 계층이 생겨나는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었다. 주나라 시대 각종 영지 및 식읍의 하사는 당시 행정 최소 단위는 읍으로서 일반적인 식읍 하사는 읍 밑의 단위로 하사는 없는 형태를 보였다.
이러한 봉건제도의 중심에 있는 왕은 통치력이 강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런 힘을 강화 시켜줄 도구가 필요했으며, 하늘의 신을 섬겼고 왕은 천자(天子)로 하늘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명분을 통해 통치력을 강화하였으며, 만약 천자가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경우 천명은 옮겨갈 수도 있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주나라도 역성혁명을 통하여 건국된 국가여서 그런 것 같다)

또한 왕뿐만이 아니라 신하들도 나름대로 하늘의 대리인인 천자로부터 사명을 수여받아서 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즉 사는 식읍을 받아 스스로를 수양하고, 경과 대부는 가를 다스리며, 제후는 국을 다스리고, 왕은 천하를 고르게 다스리며 국가에 이로운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 모두에게 내려졌던것이다. 이 사상이 바로 뒷날 단계적인 개인 수양의 뜻을 내포한 성리학 사상의 기초가 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였다. 즉 당시 주나라의 통치 체계가 중국 전체 역사의 큰 뿌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 http://www.doopedia.co.kr

위와 같은 봉건제도는 결국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의 통치력은 강하기 어려웠지만, 제후들에게 각각 하사한 영지에서 제후들이 각자 비슷한 세력을 일궈냈고, 이를 통해서 상호 간에 경쟁하는 작용도 하였으며, 주나라 초기 및 중기에는 제후들의 충성도는 상당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왕의 후손들 그리고 제후들의 후손들 간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고, 제후국 대부분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면서 각각의 제후국의 힘이 중앙의 힘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이며 점차 두각을 나타내는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다음 편에는 동주시대(춘추시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하나라

1) 개요

하나라에 대해서는 늘 의견이 분분하다. 황하문명으로 중국에서는 최초의 왕조로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중국의 한족이 바로 당시의 화하(华夏)의 유래라고 보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료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상서》혹은 《사기》등의 내용에 의존한다. 필자는 중국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수업에서는 하나라를 인정하였으며, 이는 중국의 역사가 다른 나라보다 전통이 있고 유서가 깊다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부여하여, 그 가치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2) 하나라의 시작


하나라의 건국자는 '우(禹)'라고 불리는 자이며, 《상서》에 따르면 당시 요순시대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다고 하며, 우의 아버지인 곤은 치수에 힘을 썼으나, 실패하여 결국 추방당하고 죽고 말았다. 후에 아들인 우가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아버지와 다르게 아들은 치수사업을 성공하였다. 치수의 공로로 순 임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서 중국 최초의 세습왕조이자 역사의 시작인 하나라가 시작되었다.

3) 하나라의 흥망성쇠


하나라의 우왕은 원래 세습이 아닌 다른 자인 백익이라는 자에게 순 임금과 같이 선양하려고 했으나, 그의 아들 계가 백익을 죽이면서 세습화되는 체계가 만들어진다. 사실 하나라는 중간의 역사 부분은 많이 안 남아있어 보통 초기 부분 그리고 마지막 걸왕 때가 유명하다. 보통 중국의 역사를 보면 마지막 황제는 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너무 어리거나 몇 가지 조건들이 있는데 걸왕은 포악한 편에 속하는 군주였다.
하나라의 걸왕은 즉위하자마자 수많은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궁전을 짓고, 궁녀들을 모으는 등의 온갖 악행을 일삼다가 상나라를 건국하는 탕왕에게 패퇴하여 최후를 맞이한다.
걸왕의 최후는 상나라의 폭군 주왕과 매우 유사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이 부분은 지속적으로 역사적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 있다. 앞으로 고고학이나 사료적 발견이 되면 이 시기의 역사도 더욱 명확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두산백과두피디아 http://www.doopedia.co.kr/

2. 상나라


1) 개요


상(商) 나라는 기원전 1,600년~ 1,046년 존재하였다고 전해지며, 수도는 은허로 이 때문에 은나라라고도 불린다. 상나라 역시 이전의 하나라와 마찬가지로 전설 속의 나라로 인식되어왔으나, '갑골문'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 역사가 연구되었고, 정식적인 왕조의 역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흥미롭게 해당 갑골문은 청나라 말 광서제 시기에 농촌에서 다수 발견되었는데, 당시 농민들은 갑골문은 모르고 단순히 뼈에 새겨진 조각 정도로 여겼다. 이에 한약방에 용골이라는 약재로 취급받았다. 1,890년 금석학자 왕의영이 해당 갑골문들을 보고 고대 문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상나라의 역사가 펼쳐지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연구가 없었다면 갑골문들은 모두 한약재가 되어 소멸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 상나라의 시작


상나라는 성탕(成汤)이 건국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하나라 최후의 군주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건국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갑골문 상에서는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이며, 실제 건국과는 관련이 없다고는 한다. 하지만 필자가 중국에서 배워 온 내용 그대로 이야기하며, 당시에는 상나라의 건국은 탕왕으로 배웠으며 현재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3) 상나라의 흥망성쇠


상나라는 기원전 13세기 무정(武丁) 때 가장 번성하였다고 하며, 고대사에서도 강조하는 시기이며 제일 언급이 많다. 해당 시기에 주변 민족들 대부분을 복속시켰으며, 상나라의 명군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무정의 재위 기간은 천하가 모두 기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평민 및 천민들과 천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농사를 지어 그 어려움을 알았다. 또한 부열과 감반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면서, 안정적인 치세를 일궈내며 해당 시기를 무정성세(武丁盛世)로 불렸을 정도이니 그 위세는 실로 대단하였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왕조 말기에 제을(상나라 28대 왕)과 제신(상나라 29대 왕) 두 왕의 무리한 동방정책으로 서쪽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주나라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주나라는 현재 산시 성 지역 일대의 세력을 규합하여 상나라를 공격하였다.
상나라의 멸망을 알린 목야의 대회전은 오늘날 '혁명의 시작' 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유명한데, 당시 제신은 '주지육림'을 만들고,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주나라 무왕은 이런 배경에 상나라를 공격하였고, 지금의 산시 성에서부터 상나라 수도까지 약 1,000km가 넘는 행진을 하였다. 이 기간 중에 수 많으 제후들을 만나며 같은 편으로 회유하였고 그 세력은 어느덧 40만을 넘기에 이르렀다. 당시 상나라 수도인 조가의 근처 목야에서 만나며 전투가 벌어진다. 상나라는 실제 70만 넘는 군대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노예, 비 훈련병에 신관까지 실제 전투에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적었다. 또한 주변 제후들과 협력을 구하지 못했다. 결국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이라는 한 번의 전투에서 상나라가 패퇴하면서 제신은 자신의 왕궁을 불태우고 스스로 자결하였고, 상나라는 그렇게 멸망하게 된다.
상나라의 멸망은 주나라의 건국으로 이어지면서 상나라의 마지막 왕은 주(纣)라는 폭군의 칭호를 얻게 되는 치욕까지 겪게 된다. 이 부분은 주나라가 결국 역성혁명을 통해 이루어진 왕조이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상나라를 깎아내리면서 만들어낸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싶다.

주나라 편은 다음 편에 이어서 계속 연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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