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燕)

전국 칠웅 중에서 가장 북방에 위치한 연나라. 연나라는 우리나라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은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도 잦았다고 하며, 이는 당시 연나라가 전국칠웅에서 크게 힘을 못쓰고 확장이 어려워서 그랬다고 볼 수 있다. 연나라는 전국시대 중기에 명재상 소진을 앉혔고, 그는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연합하는 합종책을 세워서 진나라를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연나라는 이후 내부적으로 승계문제로 인해서 다툼이 있었고 반란이 발생하였다. 왕이 죽은 틈을 타서 근처의 강대국인 제나라의 민왕이 쳐들어 오면서 연나라는 당사 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결국 연나라는 한나라에 피신한 한 공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연나라의 강대국을 이끈 소양왕이었다. 소양왕은 단기간에 강대국으로 가기 위해 곽외라는 자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그는 옛날에 어느 왕이 천리마를 가지고 싶을 때 신하에게 천금을 주었는데, 그 천금으로 천리마가 아닌 천리마의 뼈를 사 왔고, 당시 신하는 천리마의 뼈를 천금 주고 살 정도면 많은 이들이 천리마를 더 비싸게 쳐줄 것으로 생각해서 팔려고 몰려들 것이라고 했고, 왕은 결국 천리마 3 필이나 얻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교훈 삼아서 곽외를 중용한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자신의 재능을 표출하고 싶은 수많은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악의를 기용하여 제나라 성 2개 빼고 전부 함락시켜 멸망 일보 직전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후손인 혜왕은 매우 어리석었으며, 전단의 이간계로 악의를 내쳤으며, 제나라는 다시 성들을 수복하였다. 이후 조나라와도 자주 분쟁하면서 국력을 소모하였고, 잦은 패배를 반복하면서 결국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연왕 희때 태자 단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자객인 형가를 보내서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기원전 222년 진나라에 멸망당하게 된다.

2. 제( 齐)

제나라는 앞서 춘추오패에서도 언급했듯이 강국이었다. 제나라는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가문의 성씨가 강씨 성에서 전 씨 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나라는 전국시대 때 선왕때 병법 전문가인 손빈을 등용하면서 점점 강해졌고, 민왕 때는 진나라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한때 왕보다 높은 칭호를 사용하는 위세를 부렸으나 연나라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 연합군에 의해 2 개성 빼고 전부 잃는 치욕을 겪었다.
민왕 자신도 거성에서 버티다가 초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초나라는 장수 요치를 파견하여 민왕을 도왔고, 민왕은 이때 그를 재상으로 앉히는 실책을 보였다. 요치는 본색을 들어내 민왕을 죽이면서 제나라를 삼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전란 속에 늘 영웅이 태어나는 것처럼 민왕의 세자를 찾아 내어 그가 양왕으로 즉위하고, 즉묵에 있던 제나라 왕족이자 명장인 전단이 군사를 이끌면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전단은 계책을 써서 연나라 명장이 악의가 실각하게 만들었고, 새로 대장으로 임명된 기겁을 격파하면서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70여성을 모두 수복하는 큰 전공을 세운다. 하지만 이미 큰 타격을 받았던 제나라는 이후 예전만큼의 강대국이 될 수는 없었고, 기원전 221년 제왕 건때 진시황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제나라는 개인적인 사견으로 이야기하고 싶은게 있는데, 제나라는 다른 강국들과 다르게 비록 성씨는 바뀌었지만 나라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삼가분진 전의 진나라는 강했지만 세 국가로 쪼개지면서  국력이 약해지고 중원에 있어 침략이 잦았고, 연나라는 너무 북방의 척박한 땅에 있으면서 춘추시대 때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초나라는 영토는 넓었지만 대부분 미개발지에 숲과 습한 기후로 당시에 발전하시 어려웠다. 제나라는 이런 국가들과는 다르게 뒤로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방비에도 유리했고, 기후 또한 양호하여 농사짓기에도 좋아서,  춘추전국시대 전체적으로 강대국으로 계속 자리 잡았다. 하지만 제나라가 결국 지리적으로 진나라에 밀렸는데 제나라는 바다가 천연의 요새이자 성장성의 한계가 되는 부분이었다. 인접 국가들도 제나라까지 들어오는 길은 평탄하여 극적으로 확장해나가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진나라는 서쪽으로도 뻗어나가고 이민족들을 제압하여 확장의 기반을 늘리고 함곡관을 통해 철통 같은 방어막 그리고 지금의 사천성인 익주 지역을 차지하면서 인력 및 물자는 풍부하였고, 국력의 손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양국의 확장성이 결국에는 천하통일의 운명을 갈랐고, 이렇듯 제나라의 위치는 애초에 천하통일을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본다.

3. 초(楚)

초나라도 제나라처럼 춘추시대때부터 그 명성을 이어오던 강대국이었고, 영토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초나라는 영토 대부분이 미개발지였다. 오늘날의 러시아가 대부분 영토가 미개발지인 것처럼 초나라 영토 대부분은 수풀이 우거지고 늪지대도 많은 미개발지였다. 실제로 장강 이남의 개발은 실질적으로 위진남북조 시대에 와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나라의 전성기는 초도왕때 오기를 등용하여 개혁을 이루고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나, 초도왕 사후 보수 귀족세력에게 오기가 죽임을 당하면서 약해지는 듯했으나, 월나라를 멸망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이런 사건 말고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암군들이 즉위함에 따라 전반적인 국력은 진나라와 제나라를 따라가지 못했고, 천도를 3번이나 하면서 불안정한 정국을 이어갔다. 초나라는 마지막 명장인 항연까지 버텨보지만 초왕 부추가 생포되면서 멸망했다.

초나라는 위의 제나라처럼 영토가 제일 큰 나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왜 멸망을 하였을까? 초나라 영토 대부분은 지금의 호남, 광동, 운남성 지역으로 지금은 대부분 지역이 고도로 발달되어있고, 호남은 삼국시대에는 형주지역으로 제후들의 다툼이 많은 중요 요충지였다. 그러나 그때 당시 강남은 중원의 중심이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개발은 더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땅 대부분은 미개간지인 늪지대로 사용이 어려웠고, 당시의 농업기술로는 해당 지역은 개발이 불가능하고 인구밀도 또한 밀집되어있지 않았다. 이에 국력은 자연스럽게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군주들이 대부분 힘이 없었고, 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점 또한 초나라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었다.

 

전국시대는 결국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완벽한 지리적 요건, 리더십 있는 군주 그리고  풍족한 경제력을 갖춘 진나라가 승자가 되는데 다음 편에는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이자 중국사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춘추시대 후기

춘추시대 후기는 중국의 동남쪽에서 오나라와 월나라가 주인공이 된다. 4번째 춘추의 패자는 바로 부차(夫差)(재위 기간 기원전 496년부터 473년)이며, 그의 아버지는 5번째 패자가 되는 월왕 구천에게 패해서 죽었다. 이때 오나라의 부차는 섶나무 위에서 복수를 다짐하였고 기원전 494년 월나라를 공격하여 구천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때 당대 유명한 책사인 오자서가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전언하였으나, 그 말을 듣지 않았고, 동시에 월나라의 범려는 당시 절세의 미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쳤고, 구천이 회계산에서 근신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당시 오자서의 충언을 듣지 않은 그는 북진정책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였고, 구천은 칼을 갈은 끝에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부차는 구천에게 화의를 요청하였으나, 구천은 그를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오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으며, 부차는 오자서의 충언을 무시한 것을 후회하며 자살하고 만다.

춘추의 마지막 패자는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재위 기간 기원전 496년부터 465년)이다. 그는 부친의 대를 이어 왕위를 받고 바로 오나라와 전쟁하여 부차의 아버지인 합려를 죽였다. 부차는 이때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섶나무 위에서 자면서 복수심을 불태웠다. 이후 구천은 오나라에 패배하여 회계산에 숨었다가 결국 오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패배를 기억하며 회계산에서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이 두 가지의 일화가 합쳐져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구천은 끝내 부차를 꺾었고, 서주에서 여러 제후들을 모아서 회맹 하였고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그는 자신을 살려낸 충신 범여를 추방하고, 또 다른 충신인 문종을 자살하게 하는 실정을 일삼았고, 이에 월나라의 패권은 자연스럽게 오래 지속될 수가 없었다. 또한 월나라 바로 옆에 있던 초나라의 세력이 워낙 막강하였고, 이전에는 오나라와 같이 초나라를 견제할 수 있었으나, 오나라까지 망하면서 월나라 혼자서 온전하게 초나라를 계속 막아야 했으니 초나라의 압박으로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면서 해상교통로를 잃으면서 점차 몰락하게 된다. 이러한 오나라와 월나라는 적이면서 동시에 초나라를 같이 막아내는 운명의 공동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상호 간의 적대 관계 속에서 같은 배를 탄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 http://www.doopedia.co.kr

2. 전국시대의 시작

전국시대의 시작은 모두들 다양한 시각이 있으며, 첫 번째 시작은 진(秦)나라의 군주 여공공이 즉위한 시점으로 보는 시작이 있었으며, 두 번째는 기원전 453년 진(晉) 나라의 유력 호족인 조간자, 위환자, 한강자가 가장 강한 호족인 지백을 죽이고 일족을 몰살하는 내전 이후,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로 분할되는 시점으로 본다. 마지막은 제나라의 성씨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교체되는 연도를 기준으로 보는 3가지 시작이 주류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국시대의 시작은 바로 성씨가 바뀌는 즉, 기존 가문들의 교체나 멸망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춘추시대의 주나라는 역사와 종교적 권위는 있었고, 각 나라들이 천자 밑의 제후로 주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점에서 유력한 제후국들은 멸망 없이 그 존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주나라의 천자로서의 힘은 완전히 상실하였고, 모든 제후국들이 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힘이 좌지우지하게 되는 끝없는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살아남은 강대국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렸으며, 이들 일곱 국가가 바로 연(燕)나라, 제(齊)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초(楚)나라, 진(秦)나라이다.

 

3. 전국칠웅(戰國七雄)

(1) 한(韓)

전국칠웅 중에서 후에 통일하게 되는 진나라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 한나라는 건국 후 기원전 355년 신불해라는 명재상을 등용하여 건국 초기에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으나, 지리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진나라와 초나라의 압박을 받았다. 또한 이궐전투에서 한나라와 위나라 연합군 약 20만 이상이 진나라 명장 백기에게 몰살당했고, 이 사건으로 한나라뿐만이 아니라 위나라까지 몰락하게 된다. 또한 영토 북쪽은 진나라와 조나라의 압박으로 계속해서 영토를 잃어갔으며, 전국칠웅 중에서도 가장 약한 국가로 자리 잡게 된다. 결국 지리적인 불리함 그리고 수십만의 경제생산 가능한 인구의 몰살은 고대사회에서 그 나라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결국 진나라의 통일 전쟁에서 첫 번째로 멸망당하게 된다.

 

(2) 위(魏)

위나라는 전국시대 칠웅 중에서 강대국 중 하나였다. 초기에 오기, 서문표 등의 명장을 등용하고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서하 지역을 빼앗아서 영토를 확장함과 동이세 국력이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이에 전성기에는 음진전투에서 5만의 군사로 진나라의 50만 대군을 격파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앙의 법가사상을 받아들인 진나라가 크게 성장하고, 오기가 위나라를 떠났고, 서쪽 지역의 영토를 점차 진나라에게 잃었다. 서쪽 지역을 상실할 때쯤 수도를 대량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천도 이후에도 내부적으로 혼란만 지속되었고 특히 혜왕시기에는 전투에서 패전이 계속되었으며, 기원전 342년에 마릉전투에서 제나라에게 크게 패하면서 완전히 기울어진다. 또한 나라의 운이 다했는지 인재 등용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주변 국가들의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악의, 범수, 손빈, 상앙 등 모두 위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못했다. 이렇게 몰락한 위나라는 끝내 기원전 225년에 진나라에게 멸망당한다.

 

(3) 조(趙)

조나라 역시 전국시대 칠웅 중에서도 강대국이었고, 위치가 북방에 위치하여 기마 전술을 도입하는 등 군사기술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조나라는 주변의 소국들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하며, 진나라를 압박하였는데 그들은 진나라의 북부지역 전반적으로 포위 해나가는 형태로 압박을 가하였다. 조나라는 무령왕하고 혜문왕때가 전성기였는데, 이 시기에 조나라의 명장 유명한 명장들인 염파, 이목, 인상여 등을 등용하였고, 지리적으로 진나라 바로 윗쪽에 위치하였고, 군사력 또한 기마전술을 이용해 크게 성장해나감에 따라 실질적인 적수가 없던 진나라의 유일한 경쟁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강하던 조나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유능한 인상여 등의 인물들이 노쇠하여 죽고, 염파는 홀로 진나라와 싸우다가 모함을  받아서 초나라로 쫓겨나면서 쇠퇴하는데,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주장이 염파에서 조괄로 바뀌면서 진나라에게 대패하였다. 이때 무려 40만 이상의 병사들이 모조리 몰살당하고, 군주들이 하나 같이 무능하였기에 최후의 명장들이 진나라를 반격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기원전 229년에서 228년경에 한나라 이후 대대적인 진나라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단이 함락되었다. 이후 세자가 남은 군사를 이끌고 반격을 도모해보지만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복귀하는 왕전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다음 편에서는 전국칠웅의 3개 국가 그리고 전국시대 최후의 승리자인 진나라의 여정을 다루고자 한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 http://www.doopedia.co.kr

1. 개요

주나라 말기 앞서 말했던 봉건제도가 약해지고, 각 제후들이 급격하게 성장함에 따라 주나라의 통치력은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공신과 친족들이 세운 제후국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게다가 주나라 근처의 이민족들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었으며, 주나라는 지리적으로 비교적 서쪽에 있어서 점차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봉화가 있었지만 주나라를 통치하던 왕이 정사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한 여인 포사의 마음을 사기에 급급하였으며, 포사의 웃음을 얻기 위해 유사시에 올리던 봉화를 이용해서 제후들을 상시 소집하였고, 양치기 소년과 같이 제후들은 점차 주나라 왕실에 대한 신뢰를 잃어 갔다.

이러한 봉화 사건으로 인해서 막상 서쪽 이민족인 견융족의 침략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봉화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제후들 어느 누구도 참전하지 않으면서 주나라 혼자서 수도를 방어해야 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당시 수도였던 호경(현재의 西安)이 공격을 받아서 함락되고, 기원전 771년 평왕 때 결국 서쪽 호경에서 동쪽 낙읍으로 천도했는데, 주 왕조가 낙읍(현재의 洛陽)으로 천도하기 전의 시대를 서주시대, 그 이후를 동주시대라고 불린다. 그리고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로 나누어지며, 그중에서 오늘 이야기하는 춘추시대는 천도 후, 기원전 403년 진(晉) 나라의 유력 대부(大夫)인 한(韓)· 위(魏)· 조(趙) 세 개 가문이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하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2. 춘추시대 초기

주나라는 천도 이후 수 많은 제후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수도를 약탈당함으로 인해 천자의 권위 실추는 물론 주나라 본거지도 잃고 전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상실하여, 춘추시대의 주나라는 제나라와 진나라 같은 강대국의 힘에 의존하여 이름뿐인 왕실만 남게 된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정나라가 두각을 보였는데, 정나라의 시조는 바로 정환공으로 정환공은 주나라에서 중요 벼슬을 하며, 견융족 침입 당시 주유왕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이 정무공이 이었고, 그는 동괵을 합병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정나라의 전성기는 정무공의 아들 정장공인데, 그는 기원전 743년에 자리를 이어받았다. 당시에 정나라는 이미 세력이 커서 주평왕도 쉽게 건드릴 수가 없었으며, 주환왕 때에는 정장공을 배척하고 정사를 괵공에게 맡기려 하자, 이에 분노한 정장공은 주나라 왕실의 곡식을 수탈하며 보복한다. 이렇게 상호 간에 틀어질 때로 틀어진 상황에서 기원전 707년 주나라에서 직접 몇몇 제후들을 모아서 정나라 정벌에 나섰지만, 수갈에서 대패하고 환왕 본인도 화살에 맞으며 주나라는 완전히 몰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외에도 정장공은 중원에서 각 제후국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초기의 패자로 군림하는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정장공이 사후 급격하게 몰락하게 되고 정나라 내부에서 승계 다툼이 벌어지는 동안 주변의 제나라와 초나라 국력이 급격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정나라는 지리적으로도 수 많은 제후국에 둘러 쌓여 있어서 나중에는 모든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3. 춘추시대 중기

춘추시대 중기는 정나라 이후로 보통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시대를 말하며, 후기는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 시기로 나눠 보면 될 듯하다. 이들은 제후들 간의 맺어진 회합이나 맹약, 즉 회맹을 열어서 맹주가 된 패자 국가로 5인의 패자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고 불린다.

제나라 환공(재위 기간 기원전 685~643년)은 양공의 이복동생으로 즉위하여, 춘추시대 유명한 포숙을 등용하였고, 포숙의 조언을 받아 관중을 등용하였으며, 이때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말하는 '관포지교'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무렵 초나라가 지속적으로 북진을 하였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제나라는 중원의 연합을 구성하여 반격을 가하였고, 양쪽 간의 담판을 통해 초나라가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함에 따라 중원의 평화를 지켜냈다. 그 외에도 제나라는 북쪽으로는 산융, 남쪽으로는 초나라, 서쪽에서는 회맹을 개최하며 그 세력을 키웠다. 또한 진나라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자 직접 개입하여 진정시키는 명실상부한 패자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제나라의 환공과 관중이 죽고, 환공의 패업은 본래 환공과 관중 두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졌기에 그 둘이 죽자 제나라는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제나라는 춘추 더 나아가서 전국시대까지 오패와 칠웅으로 남게 되나 이후에는 다시 패업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춘추시대의 제2의 패자는 진(晉)나라의 진문공(재위 기간 기원전 635년~기원전 628년)으로 그는 아버지 헌공이 여융을 토벌하고 잡아온 여비를 사랑하였고, 이에 여비 소생의 자녀를 후계자로 삼아서 태자를 죽이고, 진문공과 그의 아우를 추방 하였다. 진문공은 이때 국외 19년간 체류하다가 진(秦) 목공의 도움을 받아 진(晉)으로 돌아와서 62세에 뒤늦게 즉위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해외 체류 중에 선진, 가타, 조쇠, 호언 등의 수 많은 현사들을 중용하였고, 그들의 헌책에 따라 주나라 양왕을 도와서 난을 평정하였고,  송나라의 원조 요청을 받아서 초나라 세력을 성복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뒀고, 기원전 632년 제후들을 규합하여 초나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의 환공에 이어 제2의 패자가 되었다. 그는 나이가 연로하여 재위는 8년이였지만 신하에 유능한 인재가 많아서 사후에도 오랜기간 패자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초(楚)나라의 장왕(재위 기간 기원전 613~591년)은 제3의 패자가 되었다. 그는 초나라 목왕의 아들로 즉위 초부터 귀족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이민족들을 정벌하였다. 내부적으로는 내정을 개혁하여 상벌을 분명히 함에 따라 군신이 화목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즉위 후 신하들에게 '간언 하는 자는 처형하겠다'라고 선포하자 3년 동안 주색에 빠졌고, 당시 충신인 소종과 오거 등이 그 와중에 간언을 하였으며, 이후 그는 부패한 신하들을 몰아내고, 충신들을 중용하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기원전 611년 용나라 정복, 608년 송나라 정복, 606년 낙양 부근의 융족까지 토벌하는 등 그 세력을 떨쳤다. 장왕은 중원을 제패하려고 낙수 주변에 주둔하였고, 주나라는 장왕에게 구정을 선물하였다. 당시 주나라의 사자로 갔던 왕손만이 꾀를 내어서 장왕에게 천명은 주나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에 장왕은 군대를 철수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서나라, 진(陳)나라를 정벌하였고, 정나라를 공격하면서 진(晉)나라의 원군을 대파하면서 명실상부한 패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다. 이처럼 초나라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원 패권을 장악하며 제3의 패자로서 그 맹위를 떨칠 수 있었다.

 

다음 편은 나머지 2패인 오나라 및 월나라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1. 개요

주나라는 상나라 이후,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존재한 국가로, 주나라는 기존의 왕조와 다르게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서주와 동주로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771년까지 수도를 호경(현재의 시안(西安))에 두어서 '서주(西周)'라 칭하고, 기원전 771년 ~ 기원전 256년까지 수도가 낙읍(현재의 뤄양(洛阳))으로 천도되어서 '동주(东周)'라고 칭한다.
앞으로도 후술하겠지만, 중국의 왕조별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길게 가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혼란을 겪으며 수도 천도가 자주 발생하여 동서 혹은 남북으로 같은 왕조이나 다른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주나라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역사다운 역사가 시작된 왕조였다. 또한 중국의 천문, 인문, 다양한 사상 그리고 당시 뛰어난 문화적 발전으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점은 매우 높게 평가된다.

역사서 《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841년 전의 주나라의 역사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하며, 이는 기원전 841년 폭정을 일으켰던 주나라 여왕이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828년까지 혼란한 공백기가 있었으며,  당시에 수많은 사료들이 소실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사기》에서는 해당 시기를 공화시대(共和时代)라고 칭한다. 또한 이를 기점으로 삼아서 기년(紀年)으로 삼았으며, 이 시기부터는 연대 기록이 상세하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 문헌을 통하여 주나라 역사를 상고할 수 있는 시작점은 기원전 841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2. 주나라의 건국


주나라는 문왕때 나라의 틀을 갖추었으며, 무왕 대에 상나라 목야의 대회전을 통해 주왕을 몰아내고 상나라의 전역을 차지하였다. 이후 무왕의 아들이 어려서 숙부인 주공 단(周公旦)이 다스렸으며, 성왕이 성년이 된 후 이어받아서 즉위하여 성왕과 강왕 시대에 통치 체계가 완성되었다.
주나라는 건국할때부터 완전히 독자적 힘으로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가 없었다. 실제로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연합은 여러 세력이 함께 행동했기에 가능했다.
실제 주나라는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주위의 세력들을 원활하게 관리 할 방법이 필요했다.
실제 주나라는 상나라를 멸망 시킨 뒤에도 상나라의 잔존 세력을 달래야 했다. 이는 실제 전투에서 상나라 군사가 주나라보다 훨씬 많았던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나라는 상나라의 왕족인 미자계라는 자에게 제후로서 작위를 주었고, 그는 송나라를 만들었다. 송나라는 주나라 밑에 있었으나 그 세력은 강했으며,  낙읍지역은 주나라 시대에도 제2의 수도로서 역할을 했다.


3. 중국고대사를 함께한 봉건제도의 시작

 

중국에서는 역사를 가르칠 때 고대사회(청나라 중기까지)는 봉건사회라고 가르치며, 근대사회는 반봉건반식민지사회(半封建半殖民地社会)라고 가르친다. 이는 봉건제도와 함께 시작된 중국의 봉건사회는 고대사 내내 뿌리를 내려왔으며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왔다고 분석할 수 있다.
상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나라는 상나라를 통제하기 어려웠으며, 고대 국가로서도 강한 힘이 없었으며, 중앙집권화 된 사회라고 볼 수 없었다. 주나라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건국에 힘쓰고 통치에 기여함과 동시에 본국에 우호적인 공신이나 가문의 친척들에게 작위 및 영지를 수여하고, 각자의 영지를 통치하도록 정당성을 부여하여 유지 및 관리를 하는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주나라 시대의 봉건제도의 기틀은 다음과 같다. 중앙에는 왕이 최고 통치자로 있으며, 그 밑으로는  공, 후, 백, 자, 남의 순으로 5단계의 작위를 부여하였다. 주나라 왕실은 당시 유력 세력과의 친밀도, 군공, 그리고 전략의 중요도 등을 고려하여 왕이 직접 책봉을 하였다. 이때 후의 작위가 많았으며 이에 제후(諸侯) 즉, 여러 명의 제후들이라는 뜻이 생겨났다. 제후들은 모두 각자의 나라(영지)를 받아 국(國)이 생겨났다. 제후들은 자신의 휘하에도 유능한 수하들 그리고 공신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대부 혹은 경 불렸으며, 가(家)를 받았다. 이들 밑에는 또다시 사(士) 계층이 생겨나는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었다. 주나라 시대 각종 영지 및 식읍의 하사는 당시 행정 최소 단위는 읍으로서 일반적인 식읍 하사는 읍 밑의 단위로 하사는 없는 형태를 보였다.
이러한 봉건제도의 중심에 있는 왕은 통치력이 강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런 힘을 강화 시켜줄 도구가 필요했으며, 하늘의 신을 섬겼고 왕은 천자(天子)로 하늘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명분을 통해 통치력을 강화하였으며, 만약 천자가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경우 천명은 옮겨갈 수도 있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주나라도 역성혁명을 통하여 건국된 국가여서 그런 것 같다)

또한 왕뿐만이 아니라 신하들도 나름대로 하늘의 대리인인 천자로부터 사명을 수여받아서 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즉 사는 식읍을 받아 스스로를 수양하고, 경과 대부는 가를 다스리며, 제후는 국을 다스리고, 왕은 천하를 고르게 다스리며 국가에 이로운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 모두에게 내려졌던것이다. 이 사상이 바로 뒷날 단계적인 개인 수양의 뜻을 내포한 성리학 사상의 기초가 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였다. 즉 당시 주나라의 통치 체계가 중국 전체 역사의 큰 뿌리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 http://www.doopedia.co.kr

위와 같은 봉건제도는 결국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의 통치력은 강하기 어려웠지만, 제후들에게 각각 하사한 영지에서 제후들이 각자 비슷한 세력을 일궈냈고, 이를 통해서 상호 간에 경쟁하는 작용도 하였으며, 주나라 초기 및 중기에는 제후들의 충성도는 상당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왕의 후손들 그리고 제후들의 후손들 간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고, 제후국 대부분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면서 각각의 제후국의 힘이 중앙의 힘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이며 점차 두각을 나타내는 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다음 편에는 동주시대(춘추시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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